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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부산 측면 공세 첫 저지, 중학생 학도병 183명이 해낸 겁니다"

■ 6·25戰 첫 학도의용군 이끈 숨은 영웅
'화개장터 전투' 지휘관 정태경 중위(예비역 중령)

[이사람] '부산 측면 공세 첫 저지, 중학생 학도병 183명이 해낸 겁니다'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이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전투가 있다. 1950년 7월, 24세 중위가 이끄는 중학생 183명이 북한 인민군 최정예 부대를 4시간여 저지한 화개장터 전투다. 한국전쟁사를 연구하는 한설 순천향대 초빙교수(예비역 육군 준장·육사 40)는 “이 전투가 없었으면 부산까지 뚫릴 수 있었다”며 “패배한 소규모 전투지만 크게 보면 한국군과 유엔군의 작전적 성공에는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라고 평가했다.

화개장터 전투의 중심인물은 정태경(93·사진) 중위. 숨은 공로자이며 어린 학생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인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부모 형제가 공산당에게 살해당했음에도 좌익 장교로 의심받았고 5·16쿠데타 협조를 거부해 따돌림을 당했다. 서울대와 육사(8기)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진급 대상에서 번번이 빠졌다. ‘죽여버린다’는 협박도 평생 달고 살았다. 학도병들의 상당수는 육사 11기에 최종 합격했으면서도 입교하지 못하고 전선에서 싸웠다. 학도의용군이 조직적으로 싸운 최초의 전투, 부산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전투의 주역인 여순학도의용군과 정 중위의 싸움과 삶에는 구국의 일념과 군인정신은 물론 휴머니즘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압축돼 있다.

●전투는 졌지만 천금같은 시간 벌어

부산 노리고 우회하던 정예 6사단과

화개장터서 부딪혀 소총만으로 항전

“학생들 살리자” 전투 4시간만에 후퇴

미군과 함께 촉석루전투 등 치르기도

그사이 국군·유엔군은 전열 재정비

방어선 구축·작전성공에 결정적 기여



◇화개장터 전투 전야…‘전선의 옆구리가 터질 수 있다’=화개장터 전투가 일어난 시각은 1950년 7월25일 오전5시. 6·25전쟁이 터진 지 한 달 만이다. 여수와 순천 지역 중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학도의용군이 전투에 임하기 직전, 국군과 미군은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인민군 6사단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마철이어서 항공정찰도 어려웠다. 날이 갠 7월23일 항공정찰 보고를 받은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민군 6사단이 예상보다 빠르게 충청과 호남지역을 석권했기 때문이다. 전주에 이른 인민군 6사단은 하동-진주-마산-부산으로 이어지는 진격로를 택할 게 뻔해 보였다. 부산의 왼쪽, 마산과 진주는 아군의 병력이 거의 없어 자칫 옆구리가 터질 게 우려되는 상황. 워커 사령관은 김천 부근에서 정비 중이던 미 24사단 19연대를 진주로 급파하고 오키나와를 출항해 부산항에 도착한 29연대도 불러들였다.

◇부산을 노렸던 인민군 6사단의 미스터리=워커 중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인민군 6사단 역시 부산을 노렸다. 인민군 6사단은 중일전쟁부터 팔로군(홍군) 소속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국공내전에서는 인민해방군 166사단으로 개편돼 국민당군을 패퇴시키는 데 전공을 세운 역전의 부대였다. 실전 경험에 소련 유학까지 거친 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우회작전의 명수로 불렸다. 개전 초 끊어진 철로를 복구해 개성을 무혈점령하고 인민군 부대 가운데 처음으로 한강을 건넜다. 서해안을 따라 남진하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휩쓴 인민군 6사단은 별동대가 전주와 하동으로 진격하고 본대와 합류해 부산으로 진격할 요량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인민군 6사단은 미스터리를 남겼다. 쾌속 전진한 이들은 군산과 나주를 점령한 후 진주 방향으로 돌렸다. 군산과 나주 선점은 재보급을 받고 유엔군의 서해안 상륙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처음부터 진주·하동 방면으로 진격했다면 피난 수도인 부산이 쓸리고 전쟁도 끝날 뻔했다. 낙동강 전선에 도달할 즈음에는 국군의 반격과 미군의 공습으로 전력이 떨어져 공세종말점(culminating point)에 이른 여타 인민군 부대와 달리 이들은 초기 전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선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장비와 인원을 유지한 채 후퇴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여순학도의용군은 북한에서 처음으로 ‘근위사단’ 칭호를 받은 6사단의 선두와 맞부딪혔다.



[이사람] '부산 측면 공세 첫 저지, 중학생 학도병 183명이 해낸 겁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소재 야산 바위 위의 학도병전적비. 큰 바위 주변의 참호에서 학도병들은 인민군 6사단과 맞서 싸웠다. /사진제공=김준철 예비역 육군 대위

◇여순학도의용병, 천금 같은 3시간 반의 패배
=닳고 닳은 인민군 6사단을 화개장터에서 상대한 한국군 병력의 나이는 15~18세. 6년제 중학교 3학년 이상 학생 183명으로 이뤄진 부대였다. 급조된 15연대의 직할대로 편성된 이들의 지휘는 정태경 중위가 맡았다. 학도병들은 정 중위를 친형처럼 따랐다. 25연대 소속 보급관으로 후퇴하면서도 군수물자를 보존하며 내려왔을 만큼 치밀한 성격이 어린 학생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서울대와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라는 점도 학도병들의 신망을 샀다. 일부 학도병들은 손가락을 찔러 혈서를 쓰며 군문에 들어왔다.

하늘을 찔렀던 의기와 달리 현실은 바닥이었다. 출정(7월13일) 이후 식사를 거의 걸렀다. 소총을 지급 받은 게 7월22일. 전주 사수 명령을 받은 학도병들은 남원역 부근에서야 총기류를 받았다. 소총조차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고 일부는 탄약을 들고 따라다녔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던 이들은 기관사가 도망가는 통에 임실역에서 내려 도보로 전주로 행군해나갔다. 반대쪽으로 내려오는 피난민·패잔병과 달리 북으로 행군하며 올라가는 부대는 이들이 유일했다.

알고 보니 전주는 이미 점령당한 상황. 관촌과 남원, 구례를 거쳐 이들이 화개장터에 도착한 날이 7월24일 저녁. 마을 부인회에서 주먹밥을 내줘 사흘 만에 배를 채운 후 야산에 진을 치고 졸음과 싸우던 25일 오전4시, 이상한 첫 보고가 올라왔다. ‘길이 막혀 움직입니다.’ 적군의 이동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년병다운 표현을 중대장 정 중위는 바로 알아들었다. 소리 없이 학생들을 깨워 전투준비 명령을 내렸다. ‘내가 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사격하지 마라. 무섭거든 하늘을 향해서라도 쏴라. 그래야 산다.’

한 교수는 이에 대해 ‘훈련 안 된 소수병력을 가진 야전지휘관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평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저항에 봉착하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총성 수백 발이라면 일단 피신하고 적의 규모와 동태, 무장의 정도, 조공과 예비대의 유무를 파악하는 데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방어 입장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총을 쏴야 시간을 벌 수 있다. 적의 전력은 막강했다. 국방부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사 개정판에 따르면 이들은 화개장터로 우회한 인민군 6사단의 별동대로 병력 1,000명에 T-34 2대, 122㎜ 및 76㎜ 유탄포 각 2문, 120㎜ 박격포 2문, 45㎜ 대전차포 7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박격포는커녕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와 수류탄도 없이 오직 소총과 개인당 60여발로 맞서다 정 중위는 전투 개시 4시간 만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참호에 박격포탄이 날아오고 야산에 오른 인민군들이 등 뒤에서 따발총을 난사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정신없이 후퇴해 1차 집결지에 모여 인원을 파악하니 70여명이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나중에 삼삼오오로 20여명이 더 돌아왔다.



[이사람] '부산 측면 공세 첫 저지, 중학생 학도병 183명이 해낸 겁니다'
전남 여수시 오림동의 6·25 참전학도병기념비. 기념관까지 마련된 다른 지역의 학도병 전투와 달리 여순학도의용군 기념물은 민간 모금으로 조성된 충혼비 2개가 전부다. /사진제공=김준철 예비역 육군 대위

◇채병덕 장군, 미군 400명 하동전투서 전사=
인민군 6사단은 폭우와 더 있을지도 모를 적을 파악하느라 하동에서 숨을 골랐다. 바로 이 무렵 미군 병력이 전선에 도달했다. ‘특별한 사람’도 있었다. 초전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육군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난 채병덕 소장이 ‘미군의 안내장교를 맡겠다’고 자원해 전선으로 달려왔다. 휘하에 부관 정래혁 중령을 비롯한 10여명의 장교가 전부였던 채 소장은 27일 오전9시45분 시작된 쇠고개 전투에서 육중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미군에게 지형을 설명하다 유탄에 맞아 즉사했다. 정 중위는 바로 옆에서 채 장군이 전사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미군도 이 전투에서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마침 무전기가 파손돼 항공지원도 소용없었다. 전사와 실종 349명에 부상 52명. 포로도 100여명으로 알려졌다. 한 장소에서 이만큼 미군이 희생된 전투는 노르망디상륙작전과 쇠고개 전투 두 번뿐이다. 미군은 결국 7월30일 진주로 후퇴했으나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한 교수는 “학도의용군이 몇 시간 동안 인민군의 쾌속 전진을 지연시키지 않았다면, 미군이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며 시간을 벌지 않았다면 전쟁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선보다 군사학교” 대부분 생환시켜

지형지물 활용해 안전한 복귀 이끌어

기세오른 학도병에 “제대로 배워야”

하사관학교 입교 등 앞길 열어줘

◇정 중위, ‘전선보다 군사학교에 가라’며 대부분 살려
=여순학도의용군은 이 무렵 가슴 졸이는 해프닝을 겪었다. 하동 부근에서 철수할 때 척후소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아 애태울 때 ‘미군들이 소년 빨갱이 30여명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도병 척후소대였다. 정 중위는 급한 대로 영어를 가르치고 미군도 학도의용군의 배속을 원했다. 한국군 최초의 카투사 부대가 탄생한 셈이다. 미군에 비공식적으로 배속된 상태에서 여순학도의용군은 촉석루 전투와 진주 방어전, 마산 방어전을 치렀다. 총탄은 물론 수류탄이 무한정 보급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누리며 부산까지 내려갔다.

대부분 생환했지만 적당히 요령 피운 결과가 아니다. 광산학과 출신으로 지형지물에 밝은 정 중위는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할 수 있고 아군은 안전한 장소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진동 전투에서는 자주 기습하던 인민군이 매복한 학도병들에게 당한 뒤 움직이지 않은 적도 있다. 촉석루 전투에서는 가장 끝까지 싸우다 철수한 한국군 부대였다. 부산에 도착한 학도병들은 이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몇 차례의 전투로 싸움에 익숙해진 그들은 포항 방어전에 자원하겠다고 나섰다. 김석원 장군 부대에 들어가 싸우겠다는 학도병들을 정 중위가 타일렀다. “총 몇 번 쐈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군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싸우려는 결기는 좋지만 제대로 배워야 한다. 훈련소부터 가라. 그래야 살고 더 잘 싸울 수 있다.”

결국 10명은 바로 싸우겠다며 포항 전선으로 떠나고 나머지 120명이 제주도행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에 급히 마련된 하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 이들은 두 달 교육을 받고 전원이 임관, 신편 11사단에 배속돼 공비 토벌전을 치렀다. 학도병 동지에서 하사관 동기가 된 이들은 육군사관학교 11기 시험에 응시해 27명이 최종합격했으나 아무도 입교하지는 못했다. 전선 상황이 급했던 탓이다. 대통령 두 명을 배출한 육사 11기로 입교했다면 이들의 공적이 제대로 빛을 봤을까. 나라를 구한 소년들, 그들의 앞길을 열어준 지휘관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공식적인 전사에 여순학도의용병의 존재는 나오지 않는다.

본인들도 입을 닫고 오랜 세월을 보냈다. 운 좋게 좋은 지휘관을 만나 운 좋게 살아남아 먼저 죽어 나간 학도병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순천 매산중학교에 다니다 학도병으로 총을 잡은 후 정 중위의 권고로 하사관학교를 택했던 최은오(87) 예비역 대령은 전사한 학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멘다.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육사 11기 시험에 최종합격했으나 입교하지 못한 채 1953년 갑종장교로 임관했던 최 대령은 “어린 학생들의 충정과 헌신을 되살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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