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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아내의 열정·고뇌, 남편 거대 담론 넘어서다

■예술가 그 빛과 그림자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이연식 미술사가
디에고 '멕시코 혁명 벽화'에 집중
드넓은 벽에 정치·사회 비전 제시
프리다는 '자아도취적 작은 작품'에
인간·여성이라는 보편적 감성 담아
피카소 등 유럽의 예술가들도 열광
"남편의 '큰 그림'보다 성공" 평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지 말라.’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닭 잡는 칼이 소 잡는 칼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크고 요란한 수단은 작고 세심한 일에는 맞지 않다는 의미도 있다.

예술가들마다 ‘스케일’이 다르다. 누구는 큰 작품을, 누구는 작은 작품을 만든다. 누구는 엄청난 양을, 누구는 띄엄띄엄 조금씩 내놓는다. 크고 많은 쪽은 적극적이라는 평을 듣고, 작고 적은 쪽은 소극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전자가 늘 성공적인 건 아니다.

[오색인문학] 아내의 열정·고뇌, 남편 거대 담론 넘어서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큰 작품을 많이 만든 이와 작은 작품을 적게 만든 이가 반려로서 오랫동안 함께한 예가 있다. 디에고 리베라(886~1957)와 프리다 칼로( 1907~1954)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두고 사람들은 ‘미녀와 야수’, 혹은 ‘코끼리와 비둘기’라고 했다. 43세의 남편은 180㎝에 몸무게가 150㎏이었지만, 22세의 아내는 160㎝에 50㎏이 채 안 됐다. 디에고는 경험이 많고 프리다는 경험이 적었다.

[오색인문학] 아내의 열정·고뇌, 남편 거대 담론 넘어서다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 대통령궁 벽화 ‘멕시코의 역사’ 1929-35년

디에고와 프리다의 예술은 멕시코의 격동기에 싹을 틔우고 여물었다. 멕시코는 1521년에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 뒤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다가 1821년에 공화국으로서 독립했다. 그 후로도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혼란을 겪었고 1910년에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내고 1920년에 사회주의적인 정부가 집권했다. 새 정부는 민중을 계도하고 혁명의 의미와 목적을 알리기 위해 ‘벽화’라는 수단을 활용했다. ‘멕시코 벽화 운동’의 시작이다. 벽화에는 예술적 실험이나 개인적 감정 따위는 없었다. 식민지 시절, 독립의 과정, 농민혁명, 미국과의 전쟁, 독재정권하에서의 투쟁, 공산주의의 낙관적인 비전 같은 내용이 공공기관의 벽을 가득 메웠다. 디에고를 비롯한 몇몇 예술가들이 벽화운동의 주역이 됐다.

디에고는 일찍부터 프랑스에서 현대미술의 조류를 경험했다. 하지만 디에고가 1910년대에 그린 그림들은 입체주의의 어설픈 추종일 뿐이었다. 디에고는 1918년에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는 르네상스의 벽화들을 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고, 뒤에 이를 멕시코의 벽화에 거칠게 담으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거대한 화면을 압도적인 힘으로 메우면서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야 할 이유를 보여줬다.

[오색인문학] 아내의 열정·고뇌, 남편 거대 담론 넘어서다
프리다 칼로 ‘상처입은 사슴’ 1946년

프리다는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다리를 절었다. 18세 때, 타고 가던 버스가 노면전차와 충돌하면서 중상을 입었다. 척추 세 군데와 골반 세 군데, 오른쪽 다리는 열한 군데가 부러졌고 복부와 질에 구멍이 뚫렸다. 의사를 지망했던 프리다는 이 사고 이후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디에고를 불쑥 찾아가서는 자기 그림을 내보이며 평을 해달라고 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디에고가 미국에서 벽화를 의뢰받으면서 이 신혼부부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프리다는 디트로이트에서 유산을 했다. 앞서 겪었던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치료와 수술을 받는 와중에 디에고가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오랫동안 불륜을 저질렀음이 드러났다. 프리다는 디에고와 결별했으나 이후로도 결합과 결별을 거듭했다. 프리다는 디에고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내 평생 두 차례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전차와 충돌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디에고다.” 프리다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점차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프리다의 그림은 요령부득이다. 어찌 보면 심오하고 어찌 보면 피상적이고 어찌 보면 대단히 능란하고 어찌 보면 서툴고 조잡하다. 하지만 형식과 재료의 한계를 꿰뚫으며 우리를 쏘아본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관객 앞에 들이미는 것 같다. 느긋하고 고상한 태도로 감상할 여지도, 체계적인 분석도 들어갈 여지도 없다. 프리다의 그림이 1939년에 파리에서 전시됐을 때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예술가들은 열광했다. 피카소는 프리다에게 귀걸이를 선물했고, 칸딘스키는 프리다를 안아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디에고의 작업은 드넓은 벽들을 차지하고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그의 그림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에 비하면 프리다의 그림은 눈에 들어오기도 힘들 만큼 작고, 자기도취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달리 평가할 수도 있다. 디에고는 멕시코라는 지역에 형식적으로(벽화) 내용적으로(멕시코의 역사와 이념) 한정돼 있지만, 프리다의 작업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인간으로서의, 여성으로서의 고뇌와 열정이라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부인으로 불렸지만 오늘날은 디에고가 프리다의 남편으로 불려나오고는 한다. 수단이 미약하다고 해서 결과 또한 미약한 것이 아님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오색인문학] 아내의 열정·고뇌, 남편 거대 담론 넘어서다
이연식 미술사학자-오색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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