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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사외칼럼
[오색인문학]욕망은 헝그리정신이 아니다...깊숙한 곳엔 사랑이

■사랑, 죽음 그리고 미학- 욕망과 결핍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존재와 무·앎과 무지·선악미추 등

극단 사이의 '빔'을 결핍으로 착각

'사이'는 채우고 항상 다시 비워야

완전함을 기준삼아 부족함 느낀것

욕망은 결핍이 아닌 밝힘에 가까워

탄탈로스




컵에 물이 반쯤 담겨 있다. 어떤 이는 물이 반밖에 없다고 투덜대고 다른 이는 반이나 있다고 기뻐한다. 욕망의 크기는 만족에 반비례한다. 여기에서 컵이 욕망을 뜻한다면 욕망의 사이즈가 절반인 사람은 절반 크기의 컵에 가득 찬 물을 상상한 셈이다. 원래 컵은 모자란 것도 가득 찬 것도 아니다. 그저 빈 것일 따름이다. 컵, 즉 아랫면과 옆면에 둘러싸인 ‘허(虛)’는 무언가(물이든 커피든)를 담아 누군가에게 ‘선사함’을 뜻한다.

지난 1990년대부터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풍미하기 시작하더니 그와 함께 ‘결핍’이라는 용어도 덩달아 유행 중이다. 통상 사람들은 ‘결핍을 채우고자 함’이라고 욕망을 이해한다. 심지어 부족분을 채우려는 욕망이 사람을 더 향상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갈되지 않은 갈증인 헝그리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같은 유행어는 이 정신을 집약적으로 말해준다. 그런데 과연 인간을 ‘허기진 욕망’으로만 볼 수 있을까. 왜 이다지도 탄탈로스의 후예들이 많아진 것일까.

욕망을 결핍으로 규정한 원조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에로스적 욕망을 결핍된 존재로 보았다. 에로스는 모든 이분법적 극단, 예컨대 풍요와 빈곤(에로스는 풍요의 남신과 빈곤의 여신 사이에서 나온 자식으로 묘사됨), 존재와 무, 앎과 무지, 아름다움과 추, 선과 악 등의 ‘사이’에 있는, 무언가 부족한 존재다. 욕망은 오직 이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만약 양극단에 발을 딛고 있다면 욕망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은 알고 싶은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신은 철학하지 않는다. 철학(philosophy)은 앎(sophia)에 대한 욕망(philia)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철저하게 무식한 사람도 지적 욕망이 불가능하다. 지적 구원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질문조차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프시케


플라토닉 러브의 핵심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지고지순한 정신성’에 있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존재의 완전성을 갈망하는 사랑이고, 아름다운 (좀 더 완전한) 타자를 소유함으로써 자기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 즉 타자를 자기화하는 나르시시즘이며 궁극적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불멸에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초월, 극복하고, 죽음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컵의 빈 구석을 몽땅 채워버리려는 욕망이다.

결핍은 완전성을 전제한다. 완전성이 전제되지 않은 결핍은 없다. 완전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만 부족한 부분이 측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 100% 완벽한 것은 없다. 예컨대 완벽한 사과,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그려 볼 수 있는 이념으로 존재한다. 이 이념의 기본 모델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다. 이런 점에서 결핍을 말하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플라톤주의자임을 인정한 꼴이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성취하고 다가서야 할 완전한 존재, 즉 신과 같은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 신이 있더라도 그는 인간이 알고 있는 존재의 완전성을 초월할 것이기에 완전성으로 신을 유추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신을 완전한 존재로 그려 본 그림은 유한한 이성이 얼기설기 짜집기한 몽타주에 지나지 않는다. 동굴 속 우상을 경계했던 플라톤마저 ‘완전성이라는 허상’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다. ‘결핍-완전’의 도식 바깥에 있는 것이 인간 욕망이다. 이 도식을 통해서 인간은 한갓 ‘대상’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기껏 설계도면(완전함의 상징)이 있는 ‘사물’로서 이해된다. 설계도면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부실하고 결핍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인간을 사물과 비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욕망이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사이와 선사 그리고 밝힘’에 가까워 보인다.

욕망은 ‘사이의 빔’이다. 이 빔을 사람들은 결핍이라 착각하고 있다. 사이는 채워질 수 있으나 항상 다시 비워져야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 몸은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진, 9m가량의 긴 관(管)이라고 볼 수 있다. 몸 ‘내부의 바깥’인 그 빈 곳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공급된다. 그 에너지로 삼라만상의 존재가 드러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1.4㎏밖에 안 되는 작은 뇌가 소화기관에서 공급되는 에너지의 대략 20%나 사용한다고 한다. 그렇게 작동하는 지적 욕망은 138억년 우주의 역사와 운행 원리를 밝혀주고 있다. 욕망이 결핍이 아니라 밝힘이고 선사인 것은, 욕망 깊숙이에 ‘사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 김수영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라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것이다.

김동규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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