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젠슨 황보다 '몸값 비싼' 한국 CEO [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사내칼럼
2024.09.08 17:48:24
엔비디아가 경이적인 랠리를 보이기 전 놀라운 상승세를 보였던 기업이 있다. ‘엔비디아의 라이벌’로 불리는 AMD다. 2015년 7월 1.61달러에 불과했던 AMD 주가는 2021년 말 150달러를 넘어섰고 올 3월에는 200달러를 돌파했다. AMD 시가총액이 인텔의 1%에 불과해 “인텔이 반독점 규제를 피하기 위해 AMD를 살려놓는다”는 조롱까지 나왔던 2015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비록 최근 주가가 하락하고 있으나 현시점 실리콘밸리 ‘슈퍼스타’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당시 그 자리는 AMD의 구원자 리사 수 CEO의 것이었다. AMD가 ‘라이젠’ 중앙처리장치(CPU)를 내놓고 본격적인 부활의 시작을 알리던 2017년 초 AMD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을 청취한 적이 있다. 미국 기업 콘퍼런스콜을 라이브로 들은 것은 처음인 데다 당시에는 번역 기능도 변변치 않아 잔뜩 긴장한 상태로 콘퍼런스콜에 입장했다.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진행할 것으로 예상했던 콘퍼런스콜에서 수 CEO가 직접 질의응답을 나누고 있어서다. 국내 대기업 콘퍼런스콜을 수도 없이 청취했으나 CEO가 직접 나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특별한 발표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날 수 CEO는 투자자들의 공격적인 질문에도 당당하게 응수하며 청사진을 설파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그의 태도에서 AMD의 밝은 미래를 봤다. 이후 수많은 미국 기업의 실적 발표를 챙기며 그때 느꼈던 ‘신선함’은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CEO가 콘퍼런스콜을 주재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외려 CEO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일론 머스크도, 젠슨 황도, 마크 저커버그도 매번 실적 발표 후 콘퍼런스콜에서 투자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한다. 실적이 나쁘고 주가가 부진하면 공격적인 질문이 쏟아지지만 그들은 ‘고객사’ 앞의 ‘영업맨’이라도 된 듯 성심성의껏 답변한다. 주가 하락과 향후 실적에 대한 비판을 영업 현장의 열기로 바꿔놓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이 천문학적 부를 쌓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머스크가, 젠슨 황이, 저커버그가 돈이 없어 기업설명회(IR) 현장에 설까. 이들은 투자자 마음을 잃으면 경질을 걱정해야 할 ‘월급쟁이 대표’가 아닌 창업자이자 최대주주다. 한국에 대입하면 ‘재벌 1세’가 매 분기 2시간씩 공개적으로 투자자 질의응답을 받는 셈이다. 상장된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주주와의 소통이 CEO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않을 뿐이다. 기업의 최종 결정권자이자 책임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고 기업 비전을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부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든 회사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로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창업자는커녕 CEO가 등장하는 콘퍼런스콜도 찾아보기 힘들다. 취재해본 국내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CEO가 콘퍼런스콜을 진행하던 곳은 과거 넥슨뿐이었다. 넥슨 본사가 일본에 상장돼 있고 당시 CEO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국내 대기업 중 CEO가 콘퍼런스콜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시장경제의 첨병에 서 있는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오너 혹은 CEO가 투자자와의 소통을 회피하는 태도의 뿌리에는 기업의 주인이 ‘주주’가 아닌 ‘오너’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주주 이익에 반하는 분할 상장과 합병을 거리낌 없이 추진하는 행태 역시 마찬가지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을 신뢰할 투자자는 없다. 요즘 들어 부쩍 “국장(국내시장)에 투자하면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윤홍우의 워싱턴 24시
반세기 핵 군축 시대 붕괴…美마저 돌아서나[윤홍우의 워싱턴24시]
정치·사회
2024.09.01 20:35:45
미국 워싱턴DC의 상징 모뉴먼트 인근에 위치한 ‘메모리얼콘티넨털홀’은 유명 관광지는 아니지만 미 외교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장소로 꼽힌다. 지금은 도서관이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1921~1922년 미국 주도 최초의 군축회의인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렸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승국이 된 열강들은 경쟁적으로 전함을 건조했는데 이에 대한 재정 부담이 커지자 당시 미국 대통령 워런 개메일리얼 하딩의 제안으로 강대국들의 전함 건조에 제동을 걸었다. 탈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군축은 전함에서 핵무기로 바뀌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후 우발적 핵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커진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간 군축은 1972년 탄도미사일 발사대 수를 현 수준에서 동결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으로 시작해 1991년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감축에 합의한 전략무기감축협정(스타트)으로 이어졌고 2010년 4월 뉴스타트 체결로 강화됐다. 2009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발표했고 이를 통해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오바마 전 대통령의 비전을 공유한 사람이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움직임은 반세기 넘게 이어온 핵군축 기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 3월 중국·북한·러시아와의 핵 대결을 준비하는 내용을 반영한 핵무기 운용 지침 개정안에 서명했다. 취임 이후 적대국의 핵 공격을 억지하거나 반격하기 위해서만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핵무기 단일 목적 사용’ 공약을 폐기한 데 이어 핵무기 실전 배치를 늘리는 길까지 연 셈이다.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핵 의존을 낮추겠다는 정책을 강조했던 바이든의 행보를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라면서 “미국이 군축 기조를 포기했다기보다는 지정학적 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미러 간 맺고 있는 유일한 핵군축 협정인 뉴스타트가 2026년 종료되면 사실상 미국이 주도한 군축의 시대는 끝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한 발 더 나아가 “핵 확산은 차기 미국 대통령의 핵심 의제”라고 짚었다. 지난 10여년간 이뤄진 가장 급격한 변화는 중국이 핵 강국으로 급부상했으며 사실상 러시아의 지원 속에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미 국방부 우주정책차관보 대행을 역임한 비핀 나랑은 “러시아는 핵무기 생산을 위한 고농축우라늄 원자로 연료를 중국에 공급하고 있다”면서 “10년 전 미국이 핵 현대화 프로그램을 만들 때 예상하지 못한 중국 핵 전력의 증강 및 다양화는 새로운 핵 시대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북한 역시 핵탄두를 빠르게 늘리고 러시아에 재래식무기를 지원하면서 ‘북중러 핵 연대’라는 새로운 위협이 부상하고 있다. 대선 출마를 포기한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중국에 보내 핵 군축 회담 재개를 타진한 것도 중국의 핵 억제를 마지막 과업으로 여기기 때문으로 읽힌다. 앞서 미국은 중국에 수차례 핵 통제 회담을 제안했지만 중국 측은 대만 문제 등을 이유로 거부해왔다. 1922년 미·영·일·프·이 5개국이 서약한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은 일본의 주력함(전함) 규모를 영미의 60% 수준으로 억제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일본은 1936년 조약을 탈퇴한 후 해군력을 키웠고 결국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북중러의 핵 팽창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힘의 균형은 또다시 무너지고 전쟁의 위험은 높아질 것이다. 북핵을 머리에 얹고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군축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에 대한 경계와 철저한 대비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김광수의 中心잡기
무릎 꿇은 배달원이 들춘 中 청년취업난의 민낯 [김광수 특파원의 中心잡기]
경제·마켓
2024.08.18 17:58:36
최근 중국에서 배달원 수백 명이 아파트 관리실로 몰려가 경비원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던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 이달 12일 저장성 항저우의 아파트 단지에서 잔디밭 난간을 망가뜨린 일이 발단이었다. 경비원은 배달원의 오토바이 열쇠를 빼앗고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며 무릎을 꿇어야 키를 돌려주겠다고 협박했다. 배달원은 무릎을 꿇고 200위안(약 3만 8000원)을 물어준 후에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해당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져나가자 현지 배달원들이 문제의 아파트로 몰려왔고 배달원을 고용한 업체에서 난간 수리비를 대신 물어주며 사태가 일단락됐다. 배달원 사건의 이면에는 중국 청년층의 취업난이 자리하고 있다.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대졸자가 쏟아지지만 경기 침체로 고용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며 청년들은 배달 라이더로 내몰리고 있다. 이는 통계로 잘 드러난다. 16일 중국 국가통계국은 중국의 7월 청년 실업률이 17.1%라고 밝혔다. 전달의 13.2%에서 3.9%포인트나 오른 수치다. 지난해 12월 중국 당국이 청년 실업률 통계 방식을 바꾼 이후 최고치다. 앞서 중국은 청년 실업률이 지난해 6월 21.3%까지 치솟자 통계 발표를 돌연 중단했다. 이후 재학생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한 새로운 청년 실업률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기존 통계 기준 청년 실업률까지 넘어설 가능성이 적지 않다. 지난해 한 교수가 배달원 생활을 체험한 뒤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12~14시간씩, 한 달에 26~28일을 일해야 월평균 6000위안(약 113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취업난을 피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점도 우리나라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쳤던 상황과 비슷하다. 지난해 중국의 대학원생 정원은 76만 명이었는데 지원자는 약 474만 명으로 경쟁률이 6대1을 넘었다. 대졸자 1160만 명 중 40% 이상이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년 전부터 중국 젊은이 사이에서는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탕핑’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는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새 흉내를 내는 셀피가 유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젊은이들이 잠시나마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열망을 담은 몸부림이라는 분석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탕핑의 연장선으로 해석했다. 중국 경제를 바라보는 불안감이 중국인들, 특히 젊은이 사이에서 확산된 영향이 크다. 중국 당국은 올해 ‘5% 안팎’의 경제성장률 목표 달성을 위해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움츠러든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 회복 해법이 제시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강조하고 있는 ‘신품질 생산력’을 재차 반복했을 뿐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의 중국을 향한 견제가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에서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친 중국 젊은이들마저 중국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도 중국 당국은 현실에는 눈감은 채 우월함만을 강조한다. 청년들의 나약함을 채찍질하면서 외부의 견제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관영매체들은 최근 폐막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남자 수영의 판잔러, 여자 테니스의 정친원 등이 서방이 장악하던 종목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며 연일 목소리를 높였다. 젊은이들의 탕핑 문화를 꼬집지만 정작 중국 당국이 손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탕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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